
중세 교황권과 왕권은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대립을 지속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글에서는 이 사건이 발생하게 된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겠습니다.
1. 봉건화와 세속화
10C 초는 유럽사회의 봉건화와 세속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교황은 로마시 귀족들의 붕당 수령에 불과하였고, 오토 1세 대관식 후로는 독일황제가 임명권을 장악하고, 황제의 세력이 물러가자 다시 로마귀족들이 교황을 선택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럽전역 교회가 노르만•마자르족 침입에 시달리고 봉건화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교회와 성직자도 살아남기 위해 세속제후의 봉신이 되었으며, 그들의 임명권도 세속제후의 수중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봉건화는 교회를 세속화하고, 성직자의 기강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2. 성직 서임권 투쟁과 카노사의 굴욕
9-10C에 걸친 혼란 속에서 성직자들은 점차 세속화되어 갔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성직자 제후로서 백작의 지위와 영지를 받아 황제의 강한 통제 아래 세속 정치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강력한 국왕을 기대하고 의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국왕들은 이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성직자를 지명할 뿐 아니라 서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성직자들은 교황이 무력한 까닭에 국왕은 지상에서의 신의 목자라는 왕권신수설까지 펴게 되어 국왕의 세속 서임은 당연한 권리 행사로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11C 국왕들은 주교를 지명할 뿐 아니라 서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종교 회의(1059)에서는 교황 선출에서 로마귀족의 붕당과 독일황제의 개입을 배제하고, 로마교회의 추기경단에 의해 선출될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추기경이 교황에 의해서만 임명되는 종신직이라는 점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로써 교황 선출이 신성로마 황제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주교•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자 임명권은 세속권력에 있었습니다.
그레고리 7세(1073-1080)는 밀라노의 주교 선출에 관하여 하인리히 4세에게 간섭하지 말도록 서한을 보내는 동시에, 주교와 수도원장은 세속군주로부터 서임을 받지 말도록 규정하였습니다.(1075) <교황의 지상권(1075)>에서는 오직 그만이 주교를 임명하고 폐할 수 있으며, 황제를 폐할 권한을 가진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독일 국내의 반란이 진압되자, 밀라노의 황제파 주교에 대한 후원을 시작하고, 독일 내의 주교회의를 소집하여 그레고리를 찬탈자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에 맞서,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히의 파문과 폐위를 선언하였습니다. 독일 제후들은 2파로 나눠졌는데 반황제파는 1년 이내에 황제가 파문에서 사면받지 못하면 폐위하겠다고 결의하였습니다. 반황제파 제후•주교는 하인리히 4세를 초빙한 후, 교황 초빙하여 신성로마황제 선출을 주재해달라 요청합니다. 결국, 북이탈리아의 카노사에서 하인리히는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였고, 교황권의 우위를 인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카노사 사건 이후, 황제파와 반황제파 사이에서 내란(1077-1080)이 발생하게 됩니다. 승리한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교황을 세워 대관식을 치렀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피신하여 노르만의 보호를 받았으나, 수개월 후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 교황 우르반 2세(1088-1099)는 서임권 문제 포함한 그레고리 개혁안을 적극 추진하였고, 서임권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그 핵심은 국왕이 가지고 있는 성직자 서임권을 교황이 차지하는 대신, 성직자는 국왕의 봉신이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3. 교황권의 강화
이후, 주교 선출의 기준은 종전보다 훨씬 강화되었고, 교황권이 강화되어, 그리스도교 세계의 최고 권력자임을 인정 받게 되었습니다. 12세기에서 13세기 교황권은 강력하여 "교황은 해, 국왕은 달"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서임권 투쟁은 교회와 국가 간 지속적 대립과 긴장이라는 중세정치 한 특성인 2원성을 강하게 부각한 사건이었습니다. 교회나 국가 내에서도 지배자에 대한 ‘반항권’을 내세우는 경향을 강화한 것입니다. 서임권 문제가 발생할 무렵, 하인리히 4세는 강력한 왕권을 수립할 찰나였으나, 서임권문제의 발생은 독일의 지방제후들에게 왕권에 저항하는 기회를 주었고, 이로 말미암아 독일에서의 강력한 왕권수립은 좌절되었습니다. 하인리히 5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지방제후들은 무력한 작센공을 왕으로 선출하고, 왕권을 잠식하면서 지방할거주의를 강화시켜 나갔습니다. 독일 기사들은 자영농을 농노로 만듦에 따라, 독일 내 대부분 지역에서 영주제가 확고히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지방제후들은 주백의 권한과 재판권을 장악하고, 소영주들을 그들의 봉신으로 삼음으로써 ‘봉건제’가 전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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