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두 차례의 큰 전쟁을 치르면서 사회상이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어떻게 발생하였고, 전쟁을 거친 후 그리스 세계에 어떤 영향을 초래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세계와 소아시아 세계의 패권 다툼으로 일어난 전쟁입니다. 총 1차, 2차, 3차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그리스 세계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전개 과정이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차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는 B.C.490년에 발생한 마라톤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밀티아데스의 지휘 하에 중장보병의 밀집대가 페르시아 군 격퇴했습니다. 승리의 배경 중 하나로, B.C. 6C 후반에 청동제 대신 마•가죽으로 된 값싼 갑옷이 발명되자 농촌이나 도시의 중산하층도 스스로 무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밀집대의 견고한 힘에 기민한 기동성을 첨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의 건의에 따라 대함대를 만들었고, 그리스 아테네 중심으로 단결한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차 전쟁에서는 B.C.480년에 크세르크세스를 중심으로 페르시아군이 침입하여 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지상군은 아티카 평야로 진출하였습니다. 페르시아 군에 맞선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을 살라미스로 철수시켰고, 살라미스 해전을 벌여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 3차 전쟁에서는 B.C.479년에 그리스연합군이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폴리스들이 페르시아 위협이 아직 있다고 판단하고 힘을 모을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델로스 동맹을 맺게 됩니다. 이 동맹은 아테네를 맹주로 하는 해상 동맹으로, 동맹시에 일정한 병력과 함대 제공하거나, 불가능할 경우 일정한 자금을 제공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델로스 동맹의 자금을 관리하는 금고는 델로스 섬에 두었습니다. 델로스 동맹은 제국주의의 움직임을 가져왔습니다. 동맹시들은 대부분 종속적인 지위로 떨어지고, 동맹시가 제공하는 자금은 점차 강제적 공납금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공동 금고도 아테네로 이동시켰고, 재판도 아테네의 시민재판의 결정에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2. 펠로폰네소스 전쟁(B.C.431-B.C.404)
아테네가 서부지중해로의 진출을 시도하면서 코린트 식민시 코르키라가 아테네와의 동맹 원하게 되었는데, 이는 코린트나 메가라 등 펠로폰네소스 동맹시에게 중대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이를 좌시할 수 없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의 시칠리아 원정(B.C.415) 이후, 그의 정적들이 사소한 일을 고발하였고, 민중을 선동하여 알키비아데스를 규탄했습니다. 그러자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도망가서 원정 내용과 계획을 말해버립니다. 새롭게 대원정의 지휘자 된 니키아스는 능력도 없고 익숙하지 않아, 시칠리아 원정은 완전히 실패하게 됩니다. 아테네 함대는 스파르타 함대에 승리했으나, 폭풍으로 인한 수병 익사자가 많았습니다. 익사자 가족들은 민회에서 장군들이 구조 작업이 철저하지 못하였음을 규탄해, 6명 장군이 집단 처형되었습니다. 병력에 타격을 받은 아테네 함대는 이후 결정적으로 패하면서 스파르타가 승리하게 됩니다. 아테네 제국은 해체되고 모든 해외 재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스파르타 동맹시로서 그 지휘 아래 종속되었습니다. 함대 수 역시 제한을 받게 되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의 쇠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파르타 내 동등자들 숫자가 꾸준히 감소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페리오이코이를 동원했고, 때로는 헤일로타이까지 동원하였는데, 이들은 애국심이 투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동등자들 사이 경제적 분화가 극심해졌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계기로 군대의 원정이 증가하면서, 화폐 경제가 도입되고 사람들이 재산을 축적하려는 욕심이 많아져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어쩔 수 없이 폴리스 방위에 용병을 써야 했고, 이들의 고용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해외 원정해야 하는 악순환도 펼쳐졌습니다.
아테네에서도 시민단의 공동체적 결속 의식은 점차 줄어들고 빈부격차와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제국 상실에 따른 국가 재정의 궁핍은 피할 수 없었고, 만성 실업과 식량 부족으로 하층민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수당제가 폐지되어 정치에 무관심해지고 공직과 군역을 기피하는 것은 만연했습니다. 군대는 시민병사 대신, 자원자나 용병으로 꾸리게 되었고, 군대 재정을 지휘관에게 맡기는 경향으로 인해 군대는 사실상 폴리스로부터 독립된 직업적 전쟁 집단이 되어갔습니다.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가 쇠퇴하면서 결국 신흥 마케도니아에게 굴복하게 됩니다.
3.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을 두 문명의 투쟁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각종 보고나 견문을 깊이 확인하지 않고 역사를 수록하여, 무비판적이고 정확성이 없다는 평 듣지만, 최근 연구나 고고학적 발견을 보면, 그의 서술이 그렇게 신빙성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을 주제로 삼으면서, 문명사적 배경과 유래를 넓게 고찰하고 서술하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각국 설화•민담은 당대 사람들의 관념 세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 역할을 하였습니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록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엄밀하게 검토했습니다.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서술하고 설화나 민담은 배제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과관계 중시하면서 정확한 문헌 고증에 따른 역사 서술을 강조하였습니다. 훗날에 랑케가 이를 계승하게 됩니다.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끝까지 객관적 서술을 하려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는 역사학의 독자적 연구 시야를 개척하여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서술이 정확하여 과학적•비판적 역사서술의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여 장차 발발할 문제를 해결하고 교훈을 얻는 목적으로 역사를 서술하였습니다. 교훈의 역사, 순환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의 경과에만 초점 맞추어 문화적 관심을 확대시키지 않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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