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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

로마의 공화정의 구성요소, 민주화 간단히 정리

by 인문학 연구소 2023.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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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로마는 왕정에서 공화정, 제정까지 정치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중 공화정의 변화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로마 공화정의 구성요소

로마의 왕정은 B.C.753년부터 B.C.509년 무렵까지 전개되었으며 이후에는 공화정이 이루어집니다. 그 구성요소에는 원로원, 집정관, 민회, 평민회 등이 있었습니다.

원로원은 정무관을 지낸 사람들끼리의 모임이었으며, 종신제였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집정관에 의하여 소집되고, 집정관의 협의에 응하는 기관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공화정의 최고권력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에 걸쳐 ‘원로원의 충고(senatus consulta)’는 집정관도 거부 못하는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집정관(콘술)은 최고 정무관으로, 2명이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임기는 1년이었고, 한 달씩 교대로 집무를 수행하였는데, 상호 간 완전한 합의가 필요했습니다. 이들은 행정•군사권•민회소집권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관도 있었는데 이것 역시 정무관 못지않게 정치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쿠리아회는 가장 오래된 민회로, 로마 초기 사회의 씨족적인 조직에 따라 구성된 것으로 귀족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병사회는 전 시민의 병역 의무를 전제로, 시민들을 193개의 백인대로 조직하고, 시민의 재산에 따라 기병 이하 5등급으로 나누어, 중장보병•경장보병 등으로 구분한 조직이었습니다. 즉, 군사 조직을 토대로 한 시민총회였고, 집정관을 포함한 고위 정무관 선출의 권한이 있었고, 전쟁과 강화를 결정하는 등 권한이 매우 컸습니다.

평민회는 평민들이 거주하는 행정구, 즉 트리부스 단위로 투표가 행해졌기 때문에 트리부스회라고 불렸습니다. 초기에는 호민관의 거부권(정무관이나 원로원 결정 거부권)에 그 권한이 집중되어 있었으나, B.C.287 정식으로 입법권이 인정됨으로써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습니다.

 

2. 로마 공화정의 민주화

귀족과 평민은 상호 간 통혼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구별이 엄격하였으나, 점차 변해갔습니다. 귀족은 전쟁 수행을 위하여 평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로마의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평민의 토지 소유자의 수효도 증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성산사건(B.C.494)으로 인해 새로운 민회인 평민회(트리부스회)가 설치되었으며, 호민관 설치도 성공하게 됩니다. 호민관의 임기는 1년이었고, 10명의 합의제였습니다. 호민관은 평민의 이익을 옹호하였고, 정무관이나 원로원의 결의 및 민회에 제출된 법안에 대한 거부권(veto)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후 호민관의 권한과 기능은 평민세력의 신장과 더불어 확대됩니다.

그리고 12표법(B.C.451)은 최초의 성문법으로, 그리스의 드라콘•솔론•클레이스테네스의 법 등을 연구하여 제정되었습니다. 이는 귀족들의 자의적 법 운영을 지양하고 평민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귀족계급의 우월성 인정하는 한계가 존재했습니다. 여전히 귀족과 평민의 통혼은 금지되었고, 부채노예가 인정되었으며, 가부장 권한이 무제한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카눌레이아 법(B.C.445)으로 비로소 귀족과 평민의 통혼이 가능해졌습니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B.C.367)에는 집정관 중 1명을 평민층에서 선출한다는 내용과 토지 소유 상한선에 대한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500유게라로 토지 소유의 제한을 둔 것은 귀족(유력자)의 대토지 겸병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법으로 인해, 평민에게 돌아갈 몫이 커졌고, 실제로 정복한 땅이 평민에게 많이 분할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독재관•감찰관•법무관•신관까지 모두 평민에게 개방되어 평민층 역시 원로원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보수였기 때문에 결국 부유한 평민만이 고위관직에 흡수될 수 있었습니다. 귀족은 신분투쟁에 밀려 평민에게 양보를 거듭하여 형식적으로 평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허용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평민 중의 부유한 상층만을 새로운 통치계급으로 흡수한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 형성된 지배적인 통치 계급을 노빌레스라고 합니다. 신분투쟁의 결과 혈통적인 귀족정치에서 노빌레스의 과두정으로 정치 양상이 변하게 됩니다.

 

3. 민주화의 의의

2C에 걸친 신분투쟁으로 평민은 형식적으로 귀족과 동일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정치 욕구 충족된 모든 시민을 공동체적인 일체감•애국심으로 견고하게 결속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러한 일체감으로 단합된 시민공동체와 시민군은 로마 팽창의 거대한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탈리아 반도로 팽창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공화정의 평등과 균형의 원리에 따라 권력 기구 간 상호 견제 및 권력 분산도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독특하고 개방적이며 융통성 있는 시민권 정책으로, 시민단 자체가 확장됩니다. 이는 강압적인 지배 관계 대신 로마로의 구심적 경향과 동화주의의 움직임을 조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정무관으로 진출이 가능한 부유 계층과 기존 귀족 계급의 통혼권 결합하여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고, 그들 중심으로 공화정이 운영되었다는 한계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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