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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

그리스 참주정과 민주정의 발전상, 스파르타와의 비교

by 인문학 연구소 202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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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참주정과 민주정

 

그리스의 정치는 통치자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페이시스트라토스, 클레이스테네스, 페리클레스의 정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체제를 비교해보겠습니다.

 

1. 그리스의 정치

1)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통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메가라와의 전쟁의 군사지도자로서 무력과 평민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참주정치를 확립하였습니다. 그는 귀족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는데요. 반대 귀족을 추방하고, 순회재판제도를 실시했습니다. 한편, 중소농민층을 육성하여 그 토지를 빈농에게 분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상공업을 장려하고 은광을 개발해 시민의 세금 부담을 감소시켰습니다. 다음으로, 식민시를 확보하였습니다. 즉, 흑해로부터의 식량 공급로에 해당하는 섬을 확보한 것입니다. 또한 공공 토목 공사를 시행하여 취업 기회를 확대시켰습니다. 그는 시민 공동체 의식 강화에 주력하여, 국가 제전(판 아테나이아 제전)을 확립하였고, 공정한 사법 행정을 실시했습니다. 종교•문화 촉진에도 열을 올렸습니다. 

참주정은 사회경제적 변화와 전술의 변화로 귀족지배가 동요하고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격화된 상황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한 것이며, 독재적인 면모가 있었습니다. 이는 귀족정치에서 민주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정치현상이었습니다.

 

2) 클레이스테네스의 통치

클레이스테네스는 종전의 혈연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아테네에 있는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우선, 행정구를 개편하여 혈연적 특권을 배제하고, 이것을 경제적 이해관계가 비교적 균등하게 혼합된 행정단위로서 아테네의 모든 정치•군사적 활동의 기반으로 세웠습니다. 즉, 종전의 4개의 혈연부족을 폐지함으로써 귀족정치 기반을 붕괴시켰습니다. 그리고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시민은 혈연과 재산에 관계없이 동등한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여 민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한편, 10개의 행정부족 내에서 추첨을 통해 50인씩 선출하여 500인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이 500인회는 실질적 통치기관으로서 재정•전쟁•외교를 담당하였습니다. 500인회의 구성과 운영 방식은 모든 시민들이 제한 없이 참정의 기회를 보장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또한 민회에서는 500인회의 제안을 토의하여 채택 여부를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도편추방법을 실시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도편추방법이란 참주가 될 위험이 있는 인물을 도편에 적어 6000개 이상에 달하면 해당인물을 아테네에서 10년 간 추방하는 제도로서, 민주정치를 지키는 보완적인 성질의 것입니다. 그러나 한계로는, 아르콘•아레오파구스회의가 그대로 존속하고, 아르콘의 보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르콘은 여전히 상위 2계급에서 선출되었고, 현실적으로 4등급의 무산층은 생계의 부담 때문에 시정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3) 페리클레스의 통치

아테네의 민주정치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은 페리클레스입니다. 이 당시 페르시아 전쟁을 치렀는데요. 이 전쟁 이후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한층 더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겠습니다.

서부 지중해 패권을 둘러싸고 그리스 폴리스와 페르시아의 대립으로 일어난 페르시아 전쟁에서,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는 배 하단의 노 젓는 수군에 속해있던 사회의 최하층세력을 강화시켰으며, 전후에 있어서 대함대 건조와 해상무역의 발전은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즉, 하층민들의 정치화가 이루어졌으며, 상공인의 경제적 지위나 발언권도 증대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델로스 동맹 시의 공납금과 해상무역에서의 패권 장악은 B.C. 5C 이후 아테네의 경제적 번영에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귀족정 잔재 일소하고, 아르콘의 취임 자격을 시민 제3급으로 확대하였습니다. 또, 민회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500인회를 약화시켰습니다. 장군으로서 매년 민회에서 재선된 덕분에 페리클레스가 30년 가까이 아테네를 지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사위원회 권한을 강화시켰는데, 내외정책을 수행하는 최고정무위원회(오늘날 내각)의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이는 귀족정의 약화를 의미합니다. 나아가 시민 법정에 사법권뿐 아니라 감사 기능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수당제 실시 또한 페리클레스의 중요한 정책입니다. 500인회 위원, 배심원, 기타 공직자, 민회 참석자, 연극 관람자 등에게 수당을 지급했습니다. 이는 모든 시민의 참정권을 보장해 주는 장치로 기능했습니다. 하지만 수당제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는지 시민권 제한법도 있었는데요. 로마는 로마 시민권을 다른 민족에게도 개방하여 대제국 건설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반면, 이 당시 그리스는 시민권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재유 외인, 노예, 그리고 여성에게는 참정권이 없었고, 결국 민주정치에 참여하는 시민 수는 수적으로 제한된 좁은 범위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수당제의 압박은 민주정의 확대 추세에 비추어 역설적이게도 시민자격을 보다 폐쇄적으로 규정하여 시민단의 규모를 축소시켰습니다. 부모가 모두 시민인 자에게만 시민권을 한정한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 정치 참여의 폭 넓어지고 민주화될수록 노예제와 제국주의 정책이 오히려 강화된 것이 역설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테네 붕괴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2.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비교

1) 아테네와 스파르타 공통점

두 국가 모두 전사공동체의 폴리스로서 기능 강화될수록 내부적 민주화되어 가는 시민단의 폐쇄적 경향성이 눈에 띕니다. 외부로 향하는 군사적 성공과 더불어, 생산 기능을 대신할 예속 노동력이 그 민주정을 가능케 하는 구조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2) 아테네와 스파르타 차이점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은 강압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은무산층으로 충원되던 해군력에 기초했으므로, 무산층 부양을 위해 다른 폴리스로부터 정기적으로 공납금을 징수하였고 그들을 간접 지배하고 착취했습니다.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초창기에 주변 지역 주민을 예속화함으로써, 시민단 전체에 중무장 보병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인근 직접 지배로, 시민단 군사화를 위한 경제 기초를 확보하였고 아테네처럼 동맹 시를 착취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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