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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

아테네 폴리스의 특징과 귀족정, 솔론의 통치

by 인문학 연구소 202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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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 폴리스

 

서양고대사에서 고대 그리스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글에서는 폴리스와 정치 체제의 특징과 솔론의 정책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폴리스

1) 폴리스(Polis)의 탄생

도리아 족이나 소아시아의 선주민들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3-4개의 부족이 지리, 군사적 요충지에 모여 도시를 형성했습니다. 그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촌락들이 모여 하나의 독립된 주권국가인 폴리스를 만들었습니다.(B.C.800) 이러한 폴리스는 일차적으로 요새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적 공동체 성격을 지녔습니다. 자연적 조건도 있습니다. 그리스 본토는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서 산에 둘러싸인 골짜기나 평지는 하나의 자연적 지리 단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이 폴리스라는 소단위 국가를 성립시킨 주요 원인이기도 합니다.

 

2) 폴리스 구성과 특징

도시는 귀족•상인•수공업자 등의 비농업적 주민들의 거주지, 정치•군사•종교의 중심지였으며, 주변 촌락은 농촌 지역이었습니다. 왕권이 미약했으며 귀족정(귀족 지배의 정치체)의 정치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촌락공동체의 시민은 저마다 클레로스(분배지)의 소유자로서 경제적 독립성이 강했습니다. 시민은 폴리스를 형성하는데 참여한 부족의 성원 내지 그 후손에 해당합니다. 귀족은 곧 시민이었고, 귀족들은 기사로서 폴리스 방위의 가장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시민은 클레로스 소유자이며, 그 역의 논리로 폴리스 영역 내에서 일정한 토지 소유가 바로 시민의 자격요건이 되었습니다. 

 

3) 폴리스의 발전과 귀족지배의 동요

기원전 8~7C에는 그리스 사회가 변화했습니다. 식민시와의 접촉이 빈번해짐에 따라 해상무역이 왕성해지고, 그것은 또한 본토 내의 상공업을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공업의 발달은 B.C. 7C에 리디아로부터 화폐가 전해지면서 한층 더 촉진되었습니다.

상공업의 발달은 농업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시장을 위한 대규모 과수재배가 일어나고, 이런 대규모의 경영의 발달은 소농에게 강한 경제적 압박을 가했죠. 소농은 대토지소유자인 귀족에게 부채를 지고 소작농이나 농업노동자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부민이 등장했습니다. 해상무역, 상공업의 발달은 선박소유자, 상인, 도자기 제조업자, 직물 제조업자 등의 부와 힘을 증가시켰습니다. 이들 도시의 평민들은 지주층인 귀족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귀족정치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평민세력의 대두에는 사회경제적 변화만이 아니라 전술의 변화 또한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B.C. 8세기 말에서 B.C. 7세기 초에 중장보병 밀집대가 종전의 귀족 기사들을 대신하여 전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자력으로 중무장할 수 있는 유산시민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 유산시민이 국방의 주력이 됨으로써 이들의 정치에 대한 발언권은 증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아테네의 귀족정과 솔론의 통치

1) 귀족정치의 구조

아르콘은 9명이었고, 임기 1년이었습니다. 임기가 끝나면 자동적으로 아레오파구스회의의 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레오파구스회의는 부유한 명문출신의 귀족으로 구성되어, 귀족지배의 가장 핵심적인 기관이었습니다. 민회는 일반시민으로 구성되었고, 아르콘을 선출하였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습니다.

 

2) 솔론의 통치

솔론은 부채를 말소시키고, 부채로 인해 노예 된 자유민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리고 인신 저당 금지함으로써 부채로 인한 인신 예속화를 중지했습니다. 공동체 내부의 지배-예속 관계 소멸함으로써 새로운 전술이 요구하는 공동체 의식 강화시킨 것이죠. 하지만 그때부터 필요한 예속 노동력의 공급원을 주로 밖에서 찾아야 했다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한편, 상공업을 장려하였는데, 특히 올리브 재배를 권장했습니다. 그리고 새 화폐 제도를 시행하였고, 기술이 뛰어난 외국인 기술자들에게 시민권 부여하였습니다. 그리고 토지 소유 상한을 결정해두어 한 사람이 과하게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정치 정책면에서 시민을 재산 소유에 따라 귀족, 기사, 농민, 노동자로 구분하고, 그에 따른 정치 참여의 비중을 차등 있게 규정하였습니다. 아르콘, 아레오파구스회의는 상위  두 계층으로 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400인 회의를 통해, 각 부족으로부터 100명씩 골라 400인 회의를 만들어 민회에 제출할 안건 마련하게 하였습니다.

한편, 솔론은 정치와 재산소유를 연결하였다는 점에서 금권정치를 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귀족정 유지하면서도 하층시민에게도 불완전하게나마 정치에 참여할 길을 열어 준 것입니다. 귀족과 평민 계층 간의 갈등을 조절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를 조정자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솔론의 개혁은 귀족이나 평민, 그 어느 편도 만족시키지 못하였고, 따라서 귀족•평민의 대립과 분쟁이 재발하였습니다. 기존 체제 사회 질서의 근본적 개혁이 미흡했고, 결국은 귀족 기득권 유지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귀족정이 참주정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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