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고구려의 초기 모습은 어땠을까요? 그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한반도 역사의 중요한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구려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서 역대 왕별로 업적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기원전: 현토군과 맥족 연맹체
기원전 75년, 요동지역으로부터 현토군이 쫓겨나자, 맥족들은 여러 지역집단들을 모아 연맹체를 구성하였습니다. 이 연맹체는 점차 통합되어 다섯 '나'를 형성하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부여에서 이주한 계루집단이 세력을 강화하여 연맹체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계루 집단의 귀족들이 대표되는 계루부 왕실은 다른 네 집단의 자치력을 통제하는 강한 집권력을 구축하며, 기원후 1세기 무렵에 고구려족 전체를 통합하는 고대국가가 확립됩니다.
2. 초기 국가로의 발전
왕권강화와 중앙집권 체제 확립에 따라 지방 군장 세력은 독립성을 상실하고 왕권 밑으로 편입되었습니다. 넓은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왕권과 함께 관료제 등 중앙집권적인 조직이 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유리왕은 기원전 19년부터 기원후 18년까지 통치한 고구려의 왕입니다. 유리왕은 부여왕 대소의 질자 요구를 거부하면서 자주성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부여군이 침입하였으나 왕자 무휼이 격퇴하기도 하였습니다.
대무신왕은 부여를 침입하여 부여왕을 살해하였고, 신의 왕망과 충돌하였습니다. 이후 모본왕대에는 후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고 이로 인해 고구려의 세력이 요서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태조왕대는 고구려의 대내외적 발전의 일대 전환기였습니다. 그는 계루부 강화와 계루부 고씨의 왕위세습권 확립 등을 통해 국가를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부족적 5부 체제를 확립하고, 대외교섭권 통제를 위해 책구루를 설치하여 중국 군현과의 교섭을 중앙에 귀속시켰습니다. 그리고 옥저를 복속시켜 함흥지방을 확보하고 요동 진출도 도모하였습니다. 이러한 정복활동으로 인해 세력이 청천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고국천왕대에는 부자상속제 도입으로 웅장권이 갖아질 수 있게 하였으며, 5부 체제 개편으로 종래의 계루부, 절노부 등을 내부, 북부 등으로 개편하여 중앙귀족으로 편입시켰습니다. 또한 한미한 출신인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변화와 발전을 추진하였습니다.
3. 3세기 이후 동천왕부터 광개토대왕까지
1) 동천왕
동천왕은 중국의 삼국시대를 이용하여 고구려의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그는 위와 교섭하여 요동의 공손씨 세력을 제거하였고, 이로 인해 고구려의 대중 외교가 중단되었던 상황에서 다시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오와 친교를 맺어 중국 내부의 삼국 관계를 이용하였습니다. 그러나 242년에 서안평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였고, 위의 관구검이 침입하여 수도가 함락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2) 미천왕
미천왕 을불은 소금 장수 출신으로, 서진이 흔들린 후에 발생한 5호 16국 혼란기를 이용해 군사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311년 서안평을 점령하였고, 313년에는 낙랑, 대방, 현도 등을 차례로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요동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가담하여 선비족인 모용씨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와 협동공격하기도 하며 후조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습니다.
고국원왕 시기에는 전연의 침입으로 왕도인 환도성이 함락당하는 등 국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양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재정비에 나섰으며, 중국과 본격적으로 조공-책봉 관계를 설정하면서 외교정책으로 국난을 타파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제의 북진 정책과 충돌하면서 평양성 전투에서 근초고왕 등 백제군에게 공격받아 전사하고 맙니다.
3) 소수림왕
소수림왕은 중국의 전진과 통교를 맺어 대외 관계를 안정화하였습니다. 신라 사신 위두와 함께 전진으로 가서,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였습니다. 이는 고구려 사회에서 다양한 신화나 전설들을 포용하고 통합함으로써 분열된 귀족 세력을 규합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태학을 설립하여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 문화 향상에 기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 체제의 기반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4) 고국양왕
고국양왕은 중국의 요동군과 현도군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였으며,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우호 관계를 체결하였습니다.
5)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은 동쪽으로 숙신(여진)(398), 거란, 동부여(410) 등을 공략하여 두만강 하류 유역까지 차지하였고, 서북쪽으로는 후연(399)을 격파하여 요동 전역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고구려의 숙원이던 요동 진출을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백제에 대해서는 왕 6년(396)에 정벌을 가해 아차성, 고모루 성 등 58성 700여 마을들을 빼앗아내며 크게 타격을 주었습니다. 백제가 왜를 부추겨 신라를 자주 공격하는 것에 대응하여 보병과 기병의 관군 5만을 보내 백제-왜 연합군을 격퇴하고 가야 지역까지 진출, 점령하였습니다. 또한 신라와 가야에 군대를 주둔시켜 보호국으로 삼음으로써 신라의 왕위계승에 간여하는 등 신라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는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고구려의 자주성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며, 사망 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4. 고구려의 사회 변화
고구려 역사 초기 당시 주요 사회 변화로는 혈육 간 공동체적 관계 해체와 부자 상속 제도 도입, 취수혼의 소멸, 부인의 수절 요구 등이 있었습니다. 이는 대외적 팽창과 물질적인 부의 증대를 통해 사회 내 분화가 촉진되면서 발생한 변화들입니다. 이로 인해 단혼 가족이 생산과 소비의 기본 단위가 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또한, 효와 열 그리고 군주 개인에 대한 충성이라는 새로운 윤리관을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초기에는 여러 지역 집단들이 연맹체를 구성하며 시작된 이후 점차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 체제 확립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여러 왕들은 각자의 시대에서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주도하며 고구려의 팽창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 결과, 고구려는 한반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여 '삼국시대'라 불리는 시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고구려 역사 속에서 우리는 한반도의 초기 국가 형성 및 발전 과정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한반도 역사의 중요한 흐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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