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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

조선시대 일본과의 관계와 임진왜란

by 인문학 연구소 2023.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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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조선의 관계는 시기에 따라 변화했습니다. 조선 전기의 일본과의 관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살펴보고, 임진왜란의 배경 및 과정, 결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임진왜란

 

조선 전기 일본과의 관계

세종대 일본과의 관계

1413년, 쓰시마 출신 왜구 선단이 충청도와 황해도 일대를 침략하자 이종무를 보내 대마도를 정벌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호족들의 강력한 방어로 인해 대마도 전체를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세종은 내이포(창원), 동래(부산), 염포(울산) 등 3개 항구를 개항하고 무역을 허락하였습니다. 이를 삼포개항이라고 합니다. 이곳들과 서울에 왜관을 설치하고, 3개 항구에서만 일본인들의 숙박과 무역을 허가하였습니다.

이후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쓰시마 도주에게 선박 50척과 성사미 200석을 허가하여 무역형태를 조공 형식으로 진행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진헌물'은 수입품, '회사물'은 수출품을 의미합니다. 또한 특별한 경우에는 특송선을 보낼 수 있게 하여 막부나 호족들의 사송선이 왕래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세종대에는 일본 동향 파악을 위해서 송희경 등이 일본으로 파견되었고, '노송당일본행록', '해동제국기' 등 다양한 견문록이 작성되었습니다.

 

중종대 일본과의 관계

중종대 역시 조선과 일본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혔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 정부가 일본인의 무역 확대 요구를 재정적 부담 때문에 수용하지 못하자, 일본인들이 삼포에서 왜란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쓰시마와의 외교 단절이 이루어졌고, 비변사라는 임시 기구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임신약조를 체결하여 일본인의 왕래를 제포(창원)로 한정하고, 선박 25척과 성견미 100석을 허용하였습니다. 또한 특별조항을 폐지하여 삼포에 일본인 거주를 금지했습니다.

그 이후, 사량진에서 발생한 왜란으로 인해 조선은 사절 외의 나머지 일본인 출입을 금지하였다가, 정미약조를 체결하여 사량진왜변으로 중단되었던 대마도와의 통교를 재개했습니다. 정미약조를 통해 조선은 선박 크기, 선원 수 등을 규제하는 등 통제무역 방식을 실시하여 일본과의 무역 관계를 관리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임진왜란의 배경

대내적으로는 16세기 이후로 갑사는 유명무실해지고 기병은 보병으로, 보병은 수포군으로 변화하는 등 중앙 및 지방에서 방어 체계가 약화되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 혼란을 수습하여 새롭게 집권하면서 자신의 대륙 진출 욕구를 충족하고 무역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

전쟁 초기 : 조선의 위기

부산진과 동래성이 빠르게 함락되었고, 조선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파죽지세로 올라온 왜군을 상대했습니다.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기병중심의 전술을 구사하며 배수의 진을 쳤으나 패배했습니다. 이후 선조는 일본이 서울 근교에 다다르자 의주로 피난하여 명에 원군을 요청합니다. 수도 함락(1592.5.2) 이후 평양을 거쳐 함경도까지 치고 올라가게 되어 조선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수군과 의병의 승리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왜군의 침입을 예견하고 거북선을 개량하여 재건하고 판옥선을 재건하였습니다. 옥포해전에서 조선군은 첫 승리를 거두고, 이후 사천, 당포, 당항포 해전에서도 승리를 거둡니다. 특히 사천전투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산도 대첩에서 학익진 전술을 펼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승리로 인해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전라도의 풍부한 곡식을 전쟁에 필요한 물자로 이용하고, 바다를 통하여 북쪽으로 진격하고 있는 자신의 부대에 보급하려는 수륙협공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수군의 활약으로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전국 8도 각지에서 곽재우, 김천일, 고경명, 사명대사, 서산대사, 정문부 등의 의병장들이 이끄는 의병들의 활약도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향토지리에 익숙하고 향토조건에 알맞은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고, 매복이나 기습과 같은 유격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란의 극복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하여 진주성을 포위했으나, 진주목사 김시민이 성을 잘 지켰고, 성 밖의 곽재우가 배후에서 공격해 조선군이 승리했습니다. 이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 지원군이 도착하여 명-조선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였고, 남쪽으로 일본군을 추격하다가 벽제관에서 패배하자 다시 평양으로 후퇴하면서 일본과 화의를 맺고자 하였습니다.

명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되찾으려던 권율은 행주산성에 있다가 명군이 평양으로 퇴각하자 고립되었습니다. 평양성을 빼앗기고 퇴각한 일본군과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여, 조선군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둡니다.

행주대첩에서 패한 일본은 서울을 포기하고 경상도 해안일대로 물러나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하였고, 명의 화의에 응하여 휴전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조선의 전열을 정비하면서 훈련도감을 설치하였고, 속오법을 실시하면서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항복한 일본군으로부터 조총 제작법을 배워 조총도 만들었습니다.

이후 1597년에 정유재란이 발발하였으나 충청도 직산 소사평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이 일본의 북상을 저지하였고, 명량 해전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노량해전에서 조선의 수군이 승리하면서, 임진왜란은 끝이 나게 됩니다.

 

전쟁은 비극적이고 수많은 인적·물적 자원의 손실을 낳습니다. 많은 발전을 이뤘다는 오늘날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국가의 이기심으로 서로를 파괴적인 상황으로 내모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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